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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다...박완서

시를 읽는다... 박완서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 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비망록...문정희

남을 사랑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을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추억이 추억을 만드는 날

그대를 만나고 오는 길 흩날리는 낙엽들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소리 없이 울고 간다 걷는 발바욱 마다 아픈 세월이 스며들고 잊지도 않고 내 속에 감추어둔 사랑 이란 말 잊지 못해도 잊은채 눈물로 번지는 이 짙은 그리움 아프면 아픈대로 시리면 시린대로 그대 그림자 안으며 대답없는 메아리 고요히 내려 앉는 벽제의 그대 모습 오늘 다 울어 버린대도 눈물은 또 그리움일 것인가

나의이야기 2023.10.18

시월은 또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다...이기철

시월의 맑고 쓸쓸한 아침들이 풀밭 위에 내려와 있다 풀들은 어디에도 아침에 밟힌 흔적이 없다 지난 밤이 넓은 옷을 벗어 어디에 걸어 놓았는지 가볍고 경쾌한 햇빛만이 새의 부리처럼 쏱아진다 언제나 단풍은 예감을 앞질러 온다 누가 푸름이 저 단풍에게 자리를 사양했다고 하겠는가 뜨거운 것들은 본래 붉은 것이다 여윈 줄기들이 다 못 다독거린 제 삶을 안고 낙엽 위에 눕는다 낙엽만큼 쓸쓸한 생을 가슴으로 들으려는 것이다 욕망을 버린 나뭇잎들이 몸을 포개는 기슭은 슬프고 아름답다 이곳에서 흘러가버릴 것들, 부서질 것들만 그리워해야 한다 이제 나무들이 푸른 이파리들을 내려놓고 휴식에 들 때이다 새들과 쥐들이야 몇개의 곡식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망각만큼 편안한 것은 없다 기억은 밀폐된 곳일수록 조밀해진다 이제 가을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