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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은 또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다...이기철

시월의 맑고 쓸쓸한 아침들이 풀밭 위에 내려와 있다 풀들은 어디에도 아침에 밟힌 흔적이 없다 지난 밤이 넓은 옷을 벗어 어디에 걸어 놓았는지 가볍고 경쾌한 햇빛만이 새의 부리처럼 쏱아진다 언제나 단풍은 예감을 앞질러 온다 누가 푸름이 저 단풍에게 자리를 사양했다고 하겠는가 뜨거운 것들은 본래 붉은 것이다 여윈 줄기들이 다 못 다독거린 제 삶을 안고 낙엽 위에 눕는다 낙엽만큼 쓸쓸한 생을 가슴으로 들으려는 것이다 욕망을 버린 나뭇잎들이 몸을 포개는 기슭은 슬프고 아름답다 이곳에서 흘러가버릴 것들, 부서질 것들만 그리워해야 한다 이제 나무들이 푸른 이파리들을 내려놓고 휴식에 들 때이다 새들과 쥐들이야 몇개의 곡식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망각만큼 편안한 것은 없다 기억은 밀폐된 곳일수록 조밀해진다 이제 가을 바람..

삶의 깊이를 느끼고 싶은 날...용혜원

한 잔의 커피에서 목을 축인다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 거품만 내며 살지는 말아야지 거칠게 몰아치드라도 파도 쳐야지 겉돌지는 말아야지 가슴 한복판에 파고드는 멋진 사랑을 하며 살아야지 나이가 들어 가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렇게만 살아서는 안되는데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데 늘 조바심이 난다 가을이 오면 열매를 멋지게 맺는 사과나무와 같이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에.... 삶의 깊이를 느끼고 싶은 날 한 잔의 커피와 친구 사이가 된다

사람이 그립다...강재현

이유없이 사람이 그리운 날이 있다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서 있는 날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마음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몸만 살아 움직인 날은 진짜 사람이 그립다 가슴속 뒤주에 꼭꼭숨겨 두었던 속내 깊은 이야기 밤새 풀어 놓고 마음이 후련해 질 수 있는 그런 사람 세월가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일지라도 눈물로 쏱아내면 채에 걸러 맑은 물로 내 가슴에 돌려 줄 뿌리 깊은 내 나무 아, 이젠 나 역시 누구의 눈물을 걸러줄 그리운 사람이고 싶다.

지는 꽃을 위하여...문정희

잘 가거라 ,이 가을날 우리에게 더이상 잃어버릴 게 무어람 아무 것도 있고 아무 것도 없다 가진 것 다 버리고 집 떠나 고승이 되었다가 고승마저 버린 사람도 있느니 가을꽃 소슬히 땅에 떨어지는 쓸쓸한 사랑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른 봄 파릇한 새 옷 하루하루 황금옷으로 만 들었다가 그조차도 훌훌 벗어 버리고 초목들도 해탈을 하는 이 숭고한 가을날 잘 가거라 , 나 떠나고 빈들에 선 너는 그대로 한 그루 고승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