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향의 블로그 260

어느 날의 해바라기...이수익

장맛비 오랜 날에 갇혀 뒤뜰 해바라기 고개는 무기징역수 처럼 푹 꺾여져 있었다 그 정도였으면 좋으련만 거무스레한 빛으로 썩고 뭉그러지고 .부서져 흘러내리기도 한 그 얼굴은 ,섬뜩하니 사람 모양 이었다 일편단심 목에 칼 쓰고 임을 바라던 사육신처럼 몸은 죽어도 정신만으로 정신은 죽어도 정신의 그림자 만으로 쓰러질듯, 쓰러질 듯 서 있었다 어느 날의 해바라기...이수익

8월의 시...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 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 오는 것 풀 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전 한 번쯤은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산을 생각하게 하는 달이다 8월의 시...오광수

금을 긋는 일은...조은설

금을 긋는 일은 ...조은설 초등학교 시절, 짝꿍과 토라지고 책상 가운데 굵은 선 하나그은 적 있다 내 생애 최초의 경계선 이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산다는 것은 쉴 새 없이 금을 긋는 일임을 알았다 가끔 꿈을 실은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도 하늘 여기 저기 날카로운 금들 때문 그대를 잃고 슬픔의 무게로 살얼음 박힌 금들을 지우던 기억 나, 아직도 무릎 끓고 먼 하늘 우러르는 까닭은 지워야 할 금들이 많고 흘려야 할 눈물이 많기때문

혼자...이정하

부는 바람이야 스쳐 지나가면 그뿐 남아 흔들리던 나는 혼자 울었다 산다는 건 그렇게 저 혼자 겪어내야 하는 일이다 모든 걸 저만치 보내놓고 혼자 가슴을 쓸어 내리고 혼자 울음을 삼키며 혼자 하는 그 모든 것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일이다 흔들리되 주저앉지는 마라 손 내밀어 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 혼자 일어서려면 참 힘겹고도 눈물겨우니

이렇게 비오는 날은...오광수

이렇게 비오는 날엔 창가에 기대어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잔이 좋다 유리창을 쓰다듬는 빗줄기가 지난날 그사람 손길이 되어 들고 있는 잔을 꼭 쥐게 하면서 한 모금 천천히 입안에 모으면 온몸에 퍼지는 따스함으로 인해 저절로 나오는 가벼운 허밍 보곺은 이의 향기 였을까? 지나간 이의 속삭임이었을까? 커피향은 가슴으로 파고 드는데 목안으로 삼킬 때의 긴장은 첫마디를 꺼내기가 어려웠던 첫사랑의 고백이 되어 지그시 감은 눈으로 희미한 얼굴이 빗소리와 함께 찾아온다. 이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나만의 지난날과 함께 할 수 있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좋다

나팔꽃을 만나...김덕성

아름답게 빛나는 신선한 아침 고운 햇살이 강가 언덕에 내린다 유난히 맑은 얼굴로 붉은색 보라색이 어울린 트럼펫 연주 사방으로 퍼지고 단 하루뿐인 삶인데 그런 기색없이 사랑으로 혼신을 다하는 나팔꽃을 본다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을까 내 영혼의 문이 열리고 내게 주어진 삶이 단 하루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나도 사랑을 나누면서 보다 아름답고 기쁘게 살아야겠다 나팔꽃 처럼 나팔꽃을 만나...김덕성

그리운 폭우...곽재구

어젠 참 많은 비가 왔습니다 강물이 불어 강폭이 두 배로 더 넓어졌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금새라도 줄이 끊길 듯 흔들렸지요 그런데도 난 나룻배에 올라탔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흙탕물 속으로 달렸습니다 아, 참 한 가지 빠뜨린게 있습니다 내 나룻배의 뱃머리는 지금 온통 칡꽃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폭우 속에서 나는 종일 꽃장식을 했답니다 날이 새면 내 낡은 나룻배는 어딘가에 닿아 있겠지요 당신을 향한 내 그리움의 지름길은 얼마나 멀고도 험한지... 사랑하는 이여, 어느 하상엔가 칡꽃으로 뒤덮인 한 나룻배가 얹혀 있거든 한 그리움의 폭우가 이 지상 어디엔가 있었노라 가만히 눈감아줘요